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웨슬리 (문단 편집) === 아르미니우스주의자? === >교리상으로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파였다. >---- >"[[https://book.naver.com/bookdb/book_detail.nhn?bid=10362504|옥스퍼드 영국사]]"의 443쪽. >"...루터는 실체공존설을 신봉했고, 존 웨슬리는 극단적인 아르미니우스주의자였습니다." >---- >존 찰스 라일 리버풀 대주교. "[[https://book.naver.com/bookdb/book_detail.nhn?bid=14031616|J. C. 라일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복음주의 지도자]]"의 254쪽. >"존 웨슬리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서는 사실상 실패했습니다. 그 이유는 매우 명백합니다. 그것은 민족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리적인 문제였습니다." >---- >마틴 로이드 존스. "[[https://book.naver.com/bookdb/book_detail.nhn?bid=115643|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]]", 431쪽. 웨슬리의 아르미니우스주의 경력을 언급한 것은 한국의 장로교 신학자들만이 아니다. '''바로 영국 본토의 역사가들과 [[성공회]]로 불리는 국교회, 주요 비국교회의 주요 신학적 지도자들의 견해'''다. 여기서 비국교회는 회중교회, [[장로회]], [[침례회]] 등을 지칭한다. 또한 J.C. 라일 리버풀 대주교 등 성공회 [[저교회|저교회파]][* [[칼뱅주의]]자가 주류였으며 웨슬리를 지지했던 성직자들은 스스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라 자처하기도 했다. 이미 [[찰스 1세]]의 왕권신수설을 옹호하며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공적으로 지지했던 윌리엄 로드 캔터베리 대주교 이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자리잡았다. 또한 왕정 복고 이후로는 [[아르미니우스주의]]가 더는 이단으로 처벌되지 않았다. 존 웨슬리의 출신 지역이 윌리엄 로드 대주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지역이기도 했고.]도 마찬가지. 오히려 감리교 내부에서도 [[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|아르미니우스]]의 영향을 인정한다. 무엇보다 웨슬리가 생전에 아르미니우스의 이름을 따서 “더 알미니안"이라는 신학 잡지를 출판하여 보편구속, 의지의 자유와 선행은총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아르미니우스주의자 혹은 아르미니우스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. [[https://microform.digital/boa/collections/3/volumes/108/the-arminian-magazine|웨슬리가 출간한 더 알미니안 매거진]] 이 매거진은 칼빈주의 감리교도[* 대표적인 칼빈주의 감리교도로 조지 휫필드를 들 수 있다. 휫필드는 본래 웨슬리와 절친한 사이로 함께 감리교 운동을 일으킨 인물이었으나, 웨슬리와 달리 휫필드는 구원론에 있어서 철저히 칼빈주의를 따랐기에 신학적 노선 및 여러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웨슬리와 결별하게 된다. 그럼에도 휫필드는 일평생 웨슬리를 존경한 걸로 알려져있다. 현대의 대표적인 칼빈주의 감리교도는 마틴 로이드 존스가 있다.]와 스스로를 구별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른다는 의미였다. 웨슬리가 더 알미니안이라고 이름 붙인 이 매거진은 후에 웨슬리 메소디언 매거진으로 이름을 바꾼다. 아르미니우스 주의를 꺼리면서도 그 영향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감리교 내부의 신학자들도 동일하다. 신인협동설 역시 감리교 내에서도 웨슬리의 교리로 인정된다. 감리교출판사에서 번역하여 펴낸 "[[https://book.naver.com/bookdb/book_detail.nhn?bid=6876257|존 웨슬리의 신학 거룩한 사랑과 은총]]"에도 '하나님 홀로의 사역과 신-인 협력론'이라는 주제로 기술된 부분에서도 학자들의 견해임을 인정하면서도 독특한 측면이 있음을 주장할 뿐이다. 이미 웨슬리가 '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(On Working Out Our Salvation'이라는 설교에서 은총을 협력적인 것으로 보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저자인 케네스 콜린도 인정하고 있다. 이러한 감리교 내부의 신학자들도 신인협력설을 부정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나아가 강조하는 신학자들도 존재한다. 종교개혁가 멜랑히톤의 저서 "[[https://book.naver.com/bookdb/book_detail.nhn?bid=12169|신학총론]]"을 번역한 오하이오 감리교 신학교의 클라이드 L. 맨쉬렉도 멜랑히톤을 신인협력의 원조로 주장하는 서문을 작성했다. 영역의 원서가 된 현대어 판본을 제작한 한스 엥겔란트가 멜랑히톤이 신인협동설을 반박했음을 서문에 공언했고, 무엇보다 멜랑히톤 자신이 장을 할애하여 반박한 신인협동설에 멜랑히톤을 가두는 서술을 한 엽기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. 웨슬리가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아니며, 신인협동설과 무관함을 보이려면 웨슬리 본인의 저술로는 어렵다. 또한, 감리교 내부의 일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. 그리고 웨슬리가 전문적인 신학서적을 남기지 않았기에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는 감리교를 비롯한 웨슬리안 계통 교회들만큼은 아니지만, [[아르미니우스주의]]/알미니안주의 역시 다양하다. 아르미니우스도 자신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논쟁 과정에서 사망했다. 아르미니우스의 사망 이후 도르트회의에서 나섰던 항변파 역시 단합되지 않았고 이후도 마찬가지다. 스티븐 애슈비, 로저 올슨 등의 주장에 따르면, 고전적/개혁적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성도의 견인과 같은 구원관을 주장한다. 오히려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휴고 그로티위스의 주장을 수용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(통치설주의자)들이 성도의 타락 등의 가능성을 제기한다.[* "[[https://book.naver.com/bookdb/book_detail.nhn?bid=6325029|현대 미국 개혁주의 부활]]" 58-60쪽][* "[[https://book.naver.com/bookdb/book_detail.nhn?bid=6456754|한 번 받은 구원 영원한가]]" 217-219쪽.] 이러한 상황에서 웨슬리의 아르미니우스주의자 경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마니교 경력이나 마르틴 루터의 가톨릭 경력과 더불어 웨슬리 당시, 그리고 이후 주요 학계에서도 거론되는 바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